OzNet

국내 최정예 분석팀과
컴퓨터시스템 데이터를 접목한

OzNet

간단한 회원가입으로
365일 모든경기 분석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고객지원안내

계좌정보

농협은행 로고
예금주 : 주식회사 오즈그룹
301-0371-8458-51

고객센터

1660-3224
급한 용무는 고객센터를 이용해 주시면
빠른시간내 답변드리겠습니다.

베란다 우수관 하수구악취, 비닐로 막아도 냄새가 계속 난다면 원인부터 확인하는 전문업체 하우스클린 본사새 창 열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은하의심연58
댓글 0건 조회 6회 작성일 26-09-26 02:57

본문

1. 보이는 것만 보다적산가옥(敵産家屋), 문화주택1980년 9월 25일, 먼 길을 혼자 걸으며 어렵게 버티어오던 시간을 마치고, 드디어 현도로 전학을 왔다. 지금과 달리 추석날 하루만 공휴일이었기에 명절을 쇠고 바로 현도국민학교로 등교를 하게 되었다. 5학년 남은 잔여 일수와 6학년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보내고 졸업을 하였지만, 공부도 잘하고 재능도 많던 동네 친구 덕분에 학교 이곳 저곳을 경험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교내에는 일본식 건물이 여러 채 남아있었다. 교무실로 사용하는 목조건물이 그러하였고, 소사(小使) 아저씨가 살고계시는 학교 가까운 사택이 일본식 건물이었다. 학교 정문 밖에도 일본식 건물이 있었다. 신작로에서 마을 길로 내려가는 길목, 학교에 딸린 넓은 밭이 있었다. 그 밭 한가운데도 작은 일본가옥이 있었는데 특별활동으로 음악을 담당하던 선생님이 살고 계셨다. 어린시절을 보냈던 신탄진에도 역주변을 중심으로 목조 이층 상가를 비롯하여 많은 적산가옥이 있었지만,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며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적산가옥이라 부르는 일본식 건물을 신탄진에서는‘문화주택’이라고 불렀다. 그 동네서 잘 사는 집을 부러 높여 부르는 것이 ‘문화주택’의 인상이었다. 작은 시골학교 규모에 맞는 교장실과 교무실로 사용하던 아담한 건물이 운동장 뒤에 있었다. 얇은 유리가 깨질까 조심스러운 연두색 페인트칠이된 격자살 미닫이 문을 밀고 들어서면 마루로 된 복도가 있었고 앞은 교장실, 뒤는 교장실보다 큰 교무실이 있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가르침으로 학생들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던 신성한 곳이었다. 6학년이 되어 교장선생님이 보시는 신문을 정리하는 학생으로 발탁(?)이 되어 신성한 교장실을 매일 조심스럽게 드나들 수 있었다. 얇은 나무 판자가 어두운 밤색이 되어 벽을 둘러싸고 있었고 연두색 겪자 무늬 창으로 남향의 밝은 햇살이 눈앞에 선하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여름방학을 바로 앞두고의 일이었다. 그날은 낡은 양복을 정갈히 입으신 교장 선생님께서 책상에 앉아 계셨다. 평소 말씀이 없으셔서 더 긴장이 되어 조심스러웠는데, 묶지않고 늘어뜨린 내 긴머리가 답답해 보이셨는지 “긴머리가 덥지 않으냐?”고 물으셨다. 제 아집은 버리기 어려운 법이어서 “남들은 더워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하나도 덥지 않다”고 말대답을 드리니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사실 그때까지, 뛰놀며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가 한여름에도 덥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대답은 당차게 해놓고도 교장선생님 말씀이 신경이 쓰였던지 그날, 머리를 자르게 해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시골이라 마땅히 머리 자를 곳이 없으니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몇년을 기르기만 했던것이다. 엄마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던지 보자기는 내 목에 두루고 책받침은 머리에 대시더니, 다목적 가새로 쓱싹 쓱싹 쇠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새가 여러번 지나가며 머리카락을 떨어뜨렸지만 삐뚤빼뚤해진 머리는 돌아오지않았다. 이래저래 잘려진 머리로 태어나 처음 짧은 머리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방학을 보낸 후, 엄마가 보기에도 안되었던지 개학을 앞두고 신탄진 미용실을 다녀오게 되었다.소사(小使) 아저씨에게는 나와 같은 학년의 딸이 하나 있었다. 전학온지 얼마 않된 나와 다른 반이어서 잘 모르는 사이였지만 동네친구가 그 아이와 친해서 같이 사택에 놀러 가게 되었다. 학교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대나무숲으로 가려져 있어 관심있게 둘러보지 않으면 모르는 외딴 장소였다. 신작로가 없어지고 헐릴 것을 예상해서인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셋은 대문 겸 그 건물의 큰나무문을 밀고 들어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낮인데도 한밤중처럼 캄캄하고 어두웠다. 높은 천장 바로 아래 직사각형 창문에서 바닥으로 내려온 빛이 실내를 밝히는 빛의 전부였다. 마당을 건물로 들여온 바닥에 깔린 검은 흙이 이 건물 안을 더 어둡게 하였다. 건물안 흙 마당앞에 바닥보다 높은 마루가 놓여 있었다. 신발을 벗고 그 위에 올라가 짚이 깔린 바닥에 앉았다. 다다미였다. 다다미 한가운데 바닥이 파인 화로가 있어 큰 무쇠주전자가 높은 천장에서 내려온 줄에 매달려 있었다. 초가집이나 판잣집, 조금 나으면 기와집에 살던 사람들이 일본가옥에 살던 사람들을‘문화주택 양반’이라 하였던 일본식 가옥을 체험한 것이 처음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불편한 살림집임에도, 평소 학교 선생님보다 낮아 보였던 소사아저씨가 선생님보다 하등 꿀려보이지 않았다. ‘문화주택 양반들’이 살았던 이국적 공간에 대한 숨겨진 동경이, 소사아저씨와 선생님과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때의 나는 얼마간 혼란을 겪었다. 곧 집이 헐리게 되면서 또래 친구는 이사를 가게되어 친해지지 못했지만 우리와는 달랐던 이국적 공간에 대한 경험이 그녀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조금은 궁금하다.정문 밖 학교에 딸린 밭 안에 자리하고 있던 사택은 소사아저씨가 살던 곳보다는 집안에 흙마당도 없고 다다미 화로와 높은 천장에 걸린 주전자도 없는 작은 규모였지만 창이 많아서 밝고 환했다. 당시 국민학생들에게는 KBS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어린이 노래자랑 ‘누가누가 잘하나’프로그램 열풍이 불고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재주도 많았던 동네친구는 특히 노래를 참 잘불렀다. 음악활동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동네친구를 특별히 지도하여 예선을 무사히 통과하였고 결선대회 참가가 예정 되어 있었다. 마침 선생님이 그 사택에 살고 계셨다.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가고 개학을 앞둔 늦여름의 공휴일이었던 것 같다. 대회를 앞둔 친구가 우리와 비슷한 나이인 선생님 딸이 입던 예쁜 원피스를 빌려입고 가기로 약속이 되어있어서 따라가게 되었다. 선생님은 잠시 외출을 하셨는지 보이지 않고, 친구와 나는 또다른 이 이국적 공간을 조심스럽게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소사아저씨가 살던 이국적 풍경을 마음껏 경험했던지라 그때보다 놀라움은 덜했지만 그곳과는 완전히 다른 일본식 건물의 배치에서 그때 받았던 첫 놀라움만큼이나 새로운 충격을 받게 되었다. 선생님이 안계신 집안을 둘러본다는 것이, 죄를 짓는 사람의 마음과 같아서 살그머니 걷는 발걸음 마다 나무판재와 나무판재로 이루어진 마루에서 벌어진 틈으로 났던 삐걱대는 소리에 긴장을 멈출 수가 없었다. 주인 몰래 살펴보던 집안의 마지막 좁은 sites 복도에 다다르니 천장에서 아래가 뚫리기는 했으나 굳게 닫혀있는 낮은 높이의 나무문을 만나게 되었다. 이 문을 열어야하나 그냥 지나쳐야하나를 고민하는 사이 친구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조용히 두꺼운 문을 밀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공간이었다. 마루로 된 방이 크지는 않았으나 바닥 가운데 나무 다리가 두 개 놓여져 있었고 그 아래 구멍이 뚫려져 있었다. 많이 본 것같아 알 수도 있을 것 같았으나 설마하는 생각으로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아야 용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장소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내려다 본 구멍의 아래는 그 방의 크기 만한 거대한 변소였다. 나무 발판 위에서 본 용변이 방 한칸 크기만한 변소에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큰 변소가 집 안에 있는 장면에 놀랐던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인해 그 사택의 아기자기했던 다른 장소들을 둘러본 기억이 전부 잊혀지게 되었다. ‘똥’을 집안에 두는 미개한(?) 일본이 우리를 침략 지배하였다는 나만의 고정 관념은 비상식을 동반한, 독특하다 못해 때론 충격이기도 한 그들의 다양한 문화를 맞닥드리게 되었을 때 의당히 ‘그렇지’하며 받아들이게 했던 시발점이 되었다.초등학교 연혁을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니 1929년 4월 17일 현도공립 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 일제강점기 식민통치가 본격화된 시기에 일본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물론 지금 3채의 건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1981년 신작로에서 17번 국도가 된 도로의 확장 및 포장으로 인해 적산가옥 두 채는 이 세상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나머지 교무실 건물은 학교 현대화사업으로 인해 현대식 건물로 지어지게 되었다.건물 안에서 행해졌던 일제의 잔재라고 하는 단체기합, 학생들에게 서로 뺨을 치게 하는 등의 잔인한 폭력, 있는집 아이와 없는집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드러난 차별에 대한 상처가 기억이 되어 남아있을 뿐이다.우리시대 역사적 맥락을 모르고 겪은 일들이기도 하였지만 애써 상처를 외면하고 아프지 않은척 살아왔다. 뒤돌아 보면 그게 더 깊은 상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선하게 살아가면서 전쟁터라고 말하는 직장에서 살아남는 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늘 깨어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힘센 권력자에 무력하게 당하게 되더라도, 이유를 알고 당한다면 불의에 침묵하는 세상에서도 약자지만 상처받지 않고 넘어가 줄 수 있는 것이다. 2. 다시 길 위의 인생북문로·남문로 '현도면'의 '면'단위 시골마을에서 초,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주 시내에있는 여자고등학교로 배정받았다. 신탄진이 생활권이고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기에 더 친숙한 곳이었지만 행정적으로 청주·청원이 학군을 통합 운영하였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35km가 넘는 거리로 등하교 왕복 4시간이 걸리었다. 현도에서 시작된 배움의 길은 육체적 고통의 길이 되었다. 17번 국도를 달리는 버스를 두 번 혹은 세 번씩 갈아타며 이용하던 내덕동 문화방송↔신탄진 50번 버스는 청주의 중심인 북문로, 남문로를 직선으로 관통하였다. 삼국시대부터 행정의 중심지가 되는 장소로 근래에 이르기까지 충북도청(문화동 89번지)과 청원군청(북문로1가 171-3번지), 청주시청(북문로3가 89-1번지)이 위치해 있다. 1980년대 유행했던 SS패션, 코오롱, 금강제화 등 대기업 유명 회사의 화려한 쇼윈도우가 북문로를 지나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공원당, 쫄쫄호떡, 경화반점 등의 음식점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있었던 당시 본정통으로 불리웠던 성안길은 청주라는 소도시의 아메리칸 드림과도 같은 곳이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바라보이는 백화점과 유명 메이커 상점들이 즐비했던 본정통(성안길)은 가난한 시골출신 여학생이 활보하기에는 그 화려함에 주눅이 먼저 들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시내가 집인 또래들이 학교를 파하고 삼삼오오 성안길에서 오성당 쫄면과 쫄쫄호떡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입고 있는 죠다쉬 청바지와 나이키 운동화, 아디다스 가방 등을 자랑하는 말만 듣는 것으로도 성안길은 막연히 가보고 싶은 동경하는 공간이 되었다. 백제시대부터 도심 한가운데 성곽이 있던 읍성을 갖추었던 천년도시 청주가 일제에 의해 전부 파괴되고 욕망을 자극하는 상업적 시설만 바라보는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나는 알지 못하였다. 1980년대 어린 고등학생은 버스정류장으로만 지나쳤던 '동'단위 동네 명칭이 '북문로, 남문로'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조선시대 궁궐이 있는 서울에만 있는줄 알았던 ‘사대문’ 명칭이 지방 소도시에도 이런 이름이 있구나 하는 것만으로도 어렴풋이‘청주’는 근사한 곳이었다. 이 근사함은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 매일 청주로 나와야했던 내게는 이곳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으로 이어지기도했다. 지방의 소도시이긴 하지만 북문로, 남문로 유래가 되는 ‘사대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궁금하였다. 소도시 사대문 안에 ‘누가’‘언제부터’살게 되었는지 학업을 위해 왕복 70여km를 다녀와야하는 나로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 자격이 충분하였다. 조선후기 양근 할아버지로부터 5대 200여년에 걸친 잦은 역병과 기근을 이겨내고 이룬 터전을 버린 태철 할아버지는 1941년 어느날 밤 야반 도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미호강 자락을 따라 정착한 옛 연기군 동면 응암리에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친구였던 김종오장군을 숨겨준 큰아버지 로 6.25 전쟁통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인민군 손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쉰동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버지는 열 살에 전쟁 고아가 되어 월남 참전의 휴유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원인을 알고도 모르는채 묵묵히 걸어온 것이다. 천대받는 걸인이 먹을것을 동냥하듯, 뿌리 내릴 곳을 찾지 못하여 길 위를 떠도는 사람은 삶을 동냥하듯 허무의식을 내재하고 산다. 일제강점기, 6.25전쟁의 환난으로 길 위에서 떠돌이 삶을 살다간 사람들. 권력자의 힘을 과시한 세력 확장으로 국가간 영토 전쟁을 벌이듯이, 개인도 자기 삶의 확장을 위하여 길을 나선다. 편안한 자신만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밀어내어져 신문로 하수구 길 위의 삶을 살아갔던 고단한 사람들의 외로움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화려한 도시속에서 또 다른 외딴섬 안의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만난다. 정신의 소멸, 생성8,90년대 마땅히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의 즐길거리가 가득했던 성안길의 유래는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적인 의미에서라도 복원 대상인 청주읍성의 설치 목적과 존재 이유는 적으로부터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지역 방위를 위해서였다. 일제는 내륙 침략이 완성되자 ‘내각령 1호 성벽처리위원회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1911년 청주읍성 철거를 시작하였다. 이때 성곽 주변 도로를 남북으로 개설하고 청주읍성을 허문 성벽의 돌을 하수구를 설치하는데 사용하였다. 청주연혁지에 그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우선 성벽을 허물고 그 돌을 이용하여 새로운 하수구를 설치하고 일직선으로 석교로부터 북문에 통하는 간선도로를 개설했다. 이것이 지금의 본정통이다. 이것을 시초로 하여 종횡으로 가로를 구획해 정연한 바둑판같은 시구를 조형하였으며, 대정 4년(1915)에 이르러 그 대부분의 공사를 준공하였다.’일제는 읍성을 파훼하고 건설한 시가지에 본정통이라는 일본의 행정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 본정통은 오정목과 함께 청주의 대표적 일제 강점기 명칭으로 1990년대까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사용하였다.역사에서 자취조차 없이 사라진 청주읍성은 2013년 청주읍성 성돌모으기 운동을 시작으로 현재 중앙공원 서문쪽 일부가 복원되었다. 천년도시의 의미와 상징이 모두 사라진채 유지되는 지금의 도시는 과거와의 단절로 현재를 이어갈 수 없으며 미래도 그려지기 어렵다. 그래서 늘 도시의 정체성은 논란이 된다.시골면서기 생활 8년째인 2002년 부터 청원군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읍성 안의 역사적 시설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시대 동헌으로 사용되었던 청원군청내 청녕각은 일제 경무부가 청주군청으로 사용하다 청원군청으로 개칭하고 청사의 일부분으로 2000년까지 사용하였다. 청원군청의 담장 뒤로, 조선시대 망선루가 있던 자리에 옛청주경찰서가 있었는데, 그 무렵 이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곧 쥬네스쇼핑몰로 개발 되었다. 현재의 쥬네스주차장 자리에는 옛누각으로 기억되는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곳이 헐리어 한동안 군청 직원들의 주차장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헐린 옛누각이 언제 세워지고 무슨 건물이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하니 역사에 무지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답답한 노릇이다. 청주경찰서 이전으로 쥬네스 건물이 된 부지내에는 고려시대 지어진 목조건축물로된 2층 누각 망선루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취경루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한명회가 취경루에 올라 망선루라 고쳐부르며 바뀌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1361)때 왕이 누각에 올라 시를 짓고 과거시험을 치러 방을 내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망선루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청주보통학교의 부속 건물로써 1921년까지 교실로 사용되다가 일본경찰의 체력단련장인 무덕관을 짓기 위해 철거했는데 이를 제일교회 청년교인인 김태희 선생이 매입운동을 벌여 1923년 제일교회자리로 옮겨 짓게 되었다. 제일교회 내에 옮겨진 망선루는 청남학교교사, 청신여학교, 고등성경 학교, 세광중학교, 세광고등학교, 청신고등공민학교 등 교사로 사용되다 이후 2000년까지 교회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1960년 대 후반 청주 도심 내 물길에 관한 연구(김태영)/ 도심 복원 이미지 제작을 통한 1930년대 후기 청주읍치 경관 고찰(김태영)》2002년 청원군청에서 근무할때에는 서문시장 가는 길목으로 일제 강점기 요릿집등으로 사용되었던 적산가옥들이 노후된 모습을 간판으로 가린채 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읍성 안 조선시대 관청의 옛 건물들은 시나브로 사라져가고 읍성은 파훼되었지만, 조선시대 행정 관청인 청원군청내 동헌, 중앙공원내 병영, 사창은 오랜 세월 방치와 개축, 이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1908년 관찰도 위치 개정으로 충주에서 도청소재지가 이전되면서 읍성을 중심으로 한 청주의 도심 기능은 크게 확장되었다.1921년 청주-조치원 철도 개통으로 도시의 기능이 기존 읍성 중심에서 청주역사 주변인 북문밖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북문에서 청주역 광장을 지나 90년대까지 오정목(방아다리)이라 불리던 구간까지는 철도 보선사무소, 조선운송사업소 등 창고 및 운송업지구로 개발되었다. 현재에도 청석학원 소유의 택배회사, 물류회사 등이 옛 건물의 형태를 유지한채 운영되고 있다.현재 중앙공원 안의 병영은 충청북도 청사로 쓰이다 1937년‘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 동문 밖 현재 위치인 문화동으로 이전하게 된다.중앙공원 내에는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많은 역사적 문화유적이 있다. 병영문 입구 우리은행자리는 현재까지 친일파 후손들과 재산문제로 소송을 벌이던 일본의 통치자금을 관리했던 것으로 유명한 조선신탁회사가 위치해 있었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본정통을 제대로 걸어보게 되었다. 서울로의 진학에 실패하고 집에만 있는 나를 같은 반 짝꿍이었던 친구가 불러주었다. 세상 모든 고난을 혼자서 등에 지고 살아가던 사람을 위로해주던 고마운 친구였다. 그때 친구를 만났던 약속 장소가 중앙공원이었다. 고려말 청주 감옥에 갇히었던 목은 이색이 홍수로 부터 목숨을 구했다는 압각수 아래에서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대학에 합격하였으나 등록을 하지 못하여 공무원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다. 등록을 하지 못한 이유가 ‘친구를 대학 보내면 집을 나가겠다’는 새엄마의 아버지에 대한 선언때문이었다. 일찍이 엄마를 여읜 친구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괴산에서 청주로 유학을 나왔다. 대학생 오빠와 같이 자취를 했던 친구의 고민은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계속 바뀌는 것이었다. 심지어 친구는 아침에 학교 갈때는 이 엄마였는데 학교에 다녀오면 다른 엄마가 와 있었다고 웃으며 말하였다. 미래가 암울했던 우리였지만 중앙공원에서 만나 본정통 곳곳을 다니며 청주가 집인 친구들처럼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씩 해보았다. 중앙공원 맞은편 2층 건물에 있던 음악다방도 가보았다. 쪽지에 희망곡을 적어 바구니에 담으면 DJ가 건네받아 전축에 LP판을 돌려 틀어 주었다. ‘성인이 되면 이렇게 하는거야’ 라는 행동을 보여준 친구가 대단해 신문로 하수구 보였다. 음악이 유일한 낙이기도 하였지만 밖에 나와 한가로이 앉아서 음악을 듣는 것도 형편이 맞아야해선지, 마음이 불편하기만 하였다. 당시에는 소니의 워크맨이나 삼성 ‘마이마이’가 유행을 하였다. 어렵게 용돈을 모아 마련한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를 애지중지 몸에 지니고 다니며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중앙공원 주변에는 음악다방이 유행하고 있었고, 90년대가 되자 어두운 분위기의‘다방’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밝고 환해진‘커피숍’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3. 앵화, 앵마장, 앵좌벚꽃놀이 어디서 그런 색이 나오는지, 곱고도 화려한 것으로 치자면 많은 사람들이 장미를 꼽는다. 발길에 채이는 흔한 들꽃이라도 다 이쁘게 보인다면 나이가 들었다는 징후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각자 살아온 시간대로 이런 꽃은 이런 꽃이어서 이쁘고, 저런 꽃은 저런 꽃이어서 이쁘기 마련인가보다. 아마도 나이가 드니 이런 저런 고집을 내려놓고 자연과 사물을 너그러이 대하는 태도에서 그리되는 것이 아닌가싶다. 마음이 그러해지는 나이가 되어 봄을 기다린다면 무심천변 벚나무 가로수길에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무리를 보고서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나무는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제가 태어난 뜻대로 꽃을 피울뿐인데, 사람들은 속을 드러내지 않은 채 꽃말까지 지어가며 의미를 부여한다. 장미꽃에서 그 화려함을 동경했던 어린시절을 보았다면, 망초대의 소박한 모습에서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던 삶의 간난신고를 겪은 후 지금 모습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초로의 뒤늦은 깨달음을 본다.따뜻하고 화사한 봄을 반기며 무심천 벚꽃을 누리는 심정 한곳에는 일제 잔재를 무겁게 생각하는 마음 한편의 그늘이 있다. 화려한 꽃 모습에 내면의 불편함을 궂이 드러내기 꺼려할 뿐이다.1910년 한일병합 후, 일제는 일본땅에서 즐기던 사쿠라축제를 내륙의 식민지에서도 즐기기 위해 전국에 벚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신작로, 공원, 일본인 거주지, 신사, 심지어 궁궐에까지 서울(경성)에서 시작된 벚나무 식재는 진해, 제주도까지 빠르게 확산되어 현재 우리가 즐기는 전국 벚꽃축제의 기원이 되었다. 중학생이 된 1982년 여름방학, 동식물원 관람지로 이용되던 창경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창경궁으로 복원되어 창경원이라는 이름과 기능 모두 폐쇄되었으니 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한일이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홍화문을 걸어들어가 동물원, 식물원을 구경하고 점심 도시락을 먹던 그늘이 일제가 심은 벚나무인줄 이제야 알게된다. 왕실의 궁궐이 동물원이 된 이유 또한 당연히 알턱이 없었고, 시골사람이 서울에 간다면 으레 창경원 동물원을 가봐야 서울 갔다왔다는 자랑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해방이 되고 사십여년이나 지났음에도 궁궐은 복원되지 못하였고, 폐쇄되기 직전해 운(?)좋게 중학생이던 내가 창경원 구경을 다녀올 수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것은 어느 책을 읽은 후였다. 왕실의 먼 후손이었던 이승만은 전주이씨로서 왕실을 질투하는 마음에서 그대로 두게 되었고, 유신시대를 만든 박정희는 일본을 숭배하였기에 창경원을 그대로 남겨 두게 되었다는 글이었다. 벚꽃을 일본어로 앵화(櫻花, 사쿠라)라 한다. 일본인들은 낮에 하는 꽃놀이를 '관앵'이라 하고, 야간의 꽃구경을 '야앵'이라 하였다. 신작로에 심겨진 벚꽃 길을 그들이 말을 타고 즐길 수 있게 만든 곳을 '앵마장(櫻馬場)'이라 하였다. 《식민지 근대 경관(景觀)과 장소성(場所性), 창경원 벚꽃놀이와 군중의 탄생* 박선영》 ​「1960년대 후반 청주 도심 내 물길에 관한 연구(김태영)」에 의하면「당시 상당공원 동쪽을 지나는 대성로에는 교서교, 상당공원에서 수동성당길로 곡류하는 부분에는 앵교(櫻橋) 라 표기된 두 개의 교량이 축조되었으며, 교량 하부로 우암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지나가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두 교량은 모두 목조토교(木造土橋)라 표기되어 있는데, 교각과 교량상판의 구조부는 목재를 사용하였고, 상판에 흙을 덮어 마감하고 있다. 교량하부를 지나는 수로의 양측면은 석축을 쌓아 보강한 형태로 되어 있다.」고 위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곳 수동성당길이 일제강점기 일본이 앵마장으로 조성해 놓고 즐긴 곳으로 여겨지는 대목이기 때문이다.우리나라는 1910년대 일제에 의해 처음으로 벚꽃길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관앵’‘야앵’이라 불리던 사쿠라꽃 놀이를 즐기다가 광복 후 일제의 수탈에 시달렸던 백성들이 전국의 모든 벚꽃나무를 베어버리면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겨우내 집안에 갇혀있던 모든 청주 시민이 꽃을 보려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듯이, 수많은 인파가 바라보고 즐기는 지금의 무심천 벚나무는 일본을 숭배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1970년대 전국에서 두번째로 벚꽃길이 조성되면서 심겨진 수령 50년의 것이다. 당시 채동환이라는 청주시장이 시민들의 찬반논란속에 청주대교와 제1운천교 구간을 식재하고 나머지 구간은 이를 즐기는 시민들을 위하여 1990년대 이후 수차례 보완하여 식재한 것이다. 1931년 4월 23일 만개한 청주앵마장의 앵화 (滿開한 淸州櫻馬場의 櫻花) 1932년 4월 10일 앵의 청주? 앵마장의 앵은 바야흐로 염려 각단체연합으로 전등설비 십칠일부터 일주간 (櫻의 淸州? 櫻馬場의 櫻은 바야흐로 艶麗 各團體聯合으로 電燈設備 十七日부터 一週間)“앵마장(櫻馬場)으로의 청주냐! 청주의 앵마장(櫻馬場)이냐? 청주를 알고 앵마장을 모를 자 없는 만큼 그 이름이 높은 청주! 앵마장의 앵화(櫻花)도 날로 시간으로 그 눈은 크고 봉오리는 붉어서 봄을 자랑한다. 청주읍, 청주상업회, 청주번영회, 재청주외각신문지국에서는연합하여 오는 17일부터23일까지의 7일간을 관앵주간으로 정하고 꽃의 미를 일층더 돕기위하여16일부터는 앵지를 전등을 가설하여 기타각종袋飾을 식고 더욱이 도 관앵객의편의를돕기위하여는 앵마장과 연접한 시가공원내에 휴식장소같은것도 설치하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일년을 주기로 매월 세시풍속을 즐겼기에 꽃놀이 기록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단오날 창포물에 머리를 감거나 손톱에 봉숭아꽃물을 들이는 집안에서의 소확행이 내가 아는 전부다. 1970년대 일본말 안쓰기 신문로 하수구 캠페인이 있었다. 변또(도시락), 바께스(양동이), 다마네기(양파), 닥광(단무지), 와루바시(젓가락), 다마(전구) 등 일상에 흔히 쓰였던 많은 단어를 우리말로 바꾸어 사용하라고 강제하는 노력이 있지 않은 이상 생활속 왜색문화가 마땅한 즐길거리가 없는 우리에게 전통인양 모르고 즐기는 것이 편리한 것이 되었다.수탈의 역사에도 낮(관앵)과 밤(야앵)을 가리지 않고 꽃을 즐긴 통치가 있었고, 식민통치의 아픈 역사는 끝이 났어도 벚꽃을 통해 변화시킨 놀이문화는 우리가 지금 향유하고 있다. 극장이 먼저인가 영화가 먼저인가청주사람에게 ‘시내에 간다'는 말은 지금의 성안길을 가리키는 말이다. 2000년대 초까지 서양식 큰 접시에 담긴 손바닥만한 너비의 돈가스를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는 경향식 레스토랑이 유행하였다. 밥과 국을 주식으로 하여 수저와 젓가락을 사용하던 사람들에게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한 음식 문화가 누군가에게는 큰 사치이기도 하였다. 식사를 마치면 북문로와 남문로를 관통하는 성안길을 수 많은 인파속에 함께 걸으며 극장으로 갔다. 극장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국민학교 1학년때였다. 신탄진 기차역에서 육교를 건너면 언덕 위에 극장이 있었다. 모처럼 우리 집에 온 외삼촌이 극장구경 시켜준다고 가자하여 극장이 뭐냐?”고 물었다. 외삼촌은 ‘극장’이 무엇인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한참을 설명했다. 어린 조카를 데리고 열심히 설명해 보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자 포기하고 혼자서 극장으로 갔다. 돈을 내고 그런곳엘 왜 가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멀어져가는 외삼촌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봄, 가을이 되면 신탄진 사람들은 약을 팔기 위한 공연이었지만 요즘 보기 어려운 고난이도의 서커스도 보고, 화려한 조명과 무대장치에서 펼치는 판소리공연을 공짜로 즐길 수 있었다. 지금 보더라도 훌륭한 문화생활을 하고 있었던 신탄진 사람들에게 극장의 영화 상영은 그닥 끌리지 않는 것이었다.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일제강점기 지어진 옛 신탄진굴다리는 어둡고 음산한 아치형 천장의 동굴이었는데 입구 안쪽 벽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빨간 피를 흘리고 있는 하얀 소복을 입은 두 여자가 나란히 서 있는 파란색 바탕의 포스터가 오랫동안 붙어 있었다. 현도에서 신탄진국민학교를 가려면 이 철도 굴다리를 하루 두 번씩 지나야했다. 극장의 포스터를 알리없었던 나는, 어른들도 전쟁통에 죽은 귀신들이 나오는 곳이라 하기도 해서 학교에 가기 어려울 만큼 지나가기 싫은 곳이었다. 그래서 멀어도 신탄진역 육교를 이용해서 학교를 다녔다. 외삼촌 혼자 갔던 신탄진극장은 굳이 돈을 내고 보지 않아도 되는 지역이라 일찌 감치 문을 닫았다. 그무렵 극장에서 상영하려고 붙여 놓았던 공포영화 포스터가 관리되지 않은 채 오랜세월 붙여져 있어서 귀신이 출몰하는 섬뜩한 장소가 되었던것 같다.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작은 시골학교라 남자 한반, 여자 한반인 채로 3년을 보냈다. 우리반은 1학년때 담임선생님께서 3학년이 되어 담임을 또 맡으셨다. 미술선생님이셨는데 사회도 같이 가르치셨다. 아버지처럼 자상하시고 똑같은 학생들 담임을 2년이나 맡게 되시니, 공부를 잘 못하더라도 선생님과 사이가 좋은 아이들이 많았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미술반 활동을 하는 친구가 선생님댁을 안다며 같이 가자하여 청주를 찾아갔다. 청주대학교 아래 지금의 먹자골목 주택에 살고 계셨는데 당시는 상가가 몇없는 주택가였다. 점심때가 되어서 가까운 중국집에 데려가 짜장면을 먹이시고는 어디론가를 데려가셨다. 풀이 무성한 나대지에 버려진 쓰레기와 오물들로 몹시 지저분하였다. 그 가운데에 규모는 제법 컸지만 오래되어 허름했던 이층 건물이 있었다. 건물 정면에 한자가 쓰여있고 여러 등장인물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는 극장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스터 위에는‘청도극장’이라는 간판이 있어서 영화를 보여주려고 하시는구나를 알 수 있었다. 극장 앞에서 한참동안 우리 얼굴을 바라보시고 선생님 특유의 버릇이기도 한 혼잣말을 중얼거리셨다. 우리가 매표소 앞에서 망설이는 선생님을 바라보자‘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재빨리 극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연달아 두 편씩이나 보여주는 영상을 중간에 나올 수도 없어서 힘들게 참고 보았는데도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와서야 세상이 이렇게 부끄러운 곳이었나를 깨닫게 되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제재 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아마 후회를 하시며 옆에서 함께 영화를 보셨던 선생님도 우리를 보고 민망해 하셨고 우리도 그런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영화였다. 누구를 원망할 수 있는 시대도 환경도 아니었다. 외삼촌이 나에게 극장과 영화에 대한 설명을 해가며 데려가려 했어도 따라가지 않은 덕분에, 청도극장 삼류영화가 인생 첫 영화가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 중간·기말고사가 끝나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단체 영화관람을 보내주었다. 물론 관람료는 학생 각자 부담이었다. 첫 단체관람 영화로 간 곳이 현재 청소년광장 자리의 중앙극장이었다. ‘베스트키드'라는 영화였다. 또래뻘되는 10대 남자 주인공이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과 싸워 승리하는 장면들이 통쾌했던 영화였다. 끝나고 극장을 나와 친구들과 장면 하나 하나 감동을 넘어선 흥분을 함께 토로했다. 비록 그 시간이 지나 유치한것처럼 보여졌을지라도 그맘때는 다 그런것을 지금에서야 인정해 줄 수 있는 영화였다. 한편 영화와 극장에 대한 아쉬움은 나에게 항상 따라다녔다. 궂이 안해도 다안다는 나이를 불구한 자만이 뒤늦게 친구들을 쫒아다니며 배워가야했던 경험이 인생에서 어떤 교훈을 주는지 말이다. 청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에는 청주극장과 중앙극장 두개의 대극장이 있었다. 대극장에서는 단관극장이라 하여 표를 사면 한편씩 틀어주었는데 선생님이 데려가셨던 청도극장은 변두리에 위치하여 저렴한 요금을 받아 운영하는 두 개의 영화를 보여주는 재생관이었다. 90년대까지 청주에는 대극장과 소극장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대극장은 개봉관이라하여 서울에서 흥행이 끝나갈 무렵 청주에 들여와 한편만 상영 하였다. 소극장은 개봉이 한참 지난 두 편의 영화를 대극장보다 싼 요금을 받고 상영해주어 관람객 입장에서는 호불호가 있었다. 1980년 sites 말, 동생 친구 아버지가 상당공원 근처에 있던 도도극장이라는 소극장에서 총무일을 보시는데 매표소에서 점원을 구한다 하여 면접을 보고 얼마간 매표소 점원일을 하게 되었다. 건물 2·3층이 영화관이었고 1층과 2층으로 오르는 계단사이에 매표소가 있었다. 극장에는 총무외에도 매점일을 보는 아주머니 내외가 극장 청소를 겸하여 일하고 계셨고, 영사실에서 필름을 돌리는 영사기사, 영화배급사에서 나온 직원이 매표소에서 구입한 표를 관람객으로부터 돌려받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작은 규모의 소극장이어서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편의 영화 상영이 들어가면 필름을 돌려놓고 특별히 일이 없는 영사기사와 친해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극장 일을 배워 시작하게 되었다는 그는 영화관의 그림도 직접 그렸는데 새로운 영화가 상영될 때 마다 건물에 올려지는극장 간판 그림이 그의 솜씨였다. 도도극장의 주인은 그곳외에도 청주에 여러 개의 소극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청주나 중앙극장보다 규모는 작았으나 단관극장의 역할을 하던‘수정아트홀’도 운영을 하고 있었다. 영사기사가 두 곳의 극장을 걸어서 왔다 갔다하며 필름을 수정아트홀에서‘죽은 시인의 사회’가 개봉되자 내가 좋아할거라며 영화를 보게 해주었다. 영화에 대한 기억이 좋지만은 않아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따라갔으나 영화가 끝나고도 여운이 남아 영사기사가 필름을 돌리러 갈때마다 따라가서 여러번을 더 보았다. 주인공의 대사를 외울만큼 보고 또 보았으니 드디어 좋은 영화의 세계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청주 최초의 극장 옛 청원군청 뒤 쥬네스 건물에 대기업 상영관이 들어서면서 ‘극장’이라는 명칭이 붙은 영화 상영관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청주 최초의 극장에 대하여 오오쿠마 쇼지(大雄春峰)가 청주연혁지에 대략적인 설명을 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주에 일본인이 점차 증가하게 되면서 세월 좋게도 그들은 무미건조한 나날들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청주에는 하등(何等, 어떠한) 의 오락설비가 없다는 것을 뱃속의 기생충도 알기에 일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덕영좌’라는 극장을 만든다. 그러나 자본이 부족한 개인이 경영하는 이름뿐인 극장이어서 곧 사라지게 된다. 1916년 12월 일본인 헌병대장(櫻井 少佐), 경찰서장이 청주에 정착한 일본인과 친일파들의 자금 지원을 받아 상생정(相生町)에 극장을 신축하여 이름을‘앵좌’라 하였다. 신축을 경찰이 하고 소방조에서는 경영을 맡아 극장의 대관 수입으로 운영을 하였다. 1923년 7월에는 극장 건물에 바람과 비가 세면서 식산은행 근처 땅으로 이전을 하게된다. 일제 강점기 상생정(相生町)은 중앙공원 일대를 지칭하는 행정구역명이었다. 청주의 식산은행은 정부수립 후 한국식산은행으로 바뀌었고 한국전쟁 후 1954년에 한국산업은행으로 바뀌게 된다. ‘앵좌’는 지금의 중앙공원 근처에서 청주 산업은행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본다.매일신보를 비롯하여 조선신문, 부산일보는 1916년 12월 19일‘앵좌극장 낙성식’기사를 시작으로 1923년 앵좌 이전 후 시민대회, 기자단 궐기대회, 남녀 배우 공연, 신간지회 설립대회, 충북한해구제 연예대회, 상당유치원 음악회, 청주형평사 후원 등 1934년까지 다양한 행사를 보도한다.1934년 11월 2일부터 7차에 걸쳐 부산일보가 청주 앵좌가 본래의 사명을 몰각하였다는 ‘비난의 소리’라는 기사를 내보낸 후 앵좌의 개혁 문제가 본격 공론화 된다.1935년부터 조선신문, 매일신문, 경성일보 등이 번갈아가며 청주극장 앵좌 에 대한 이전 준비, 설계, 공사 입찰, 지진제(안전을 기원하며 지신에게 드리는 고사 의식), 앵좌 준공 지연 등에 대한 보도를 1936년까지 이어 온다.1937년 3월 12일 매일신보가 청주읍 앵좌 6월중 공사완료를 보도하고 1934년 11월부터 시작된 이전 신축 문제가 1937년 9월 본정 2정목(남문로 2가)에 상영관인 청주극장이 개장하면서 10월 30~31일 조선신문이 청주군사후원연맹에서 출정가족위문을 겸한 군국의 밤 개최, 무용극 상연을 마지막으로 앵좌의 신문보도는 사라지게 된다. 하루를 살뿐이다“꽃은 벚꽃, 사람은 사무라이”라는 일본의 대표적인 속담이 있다. 고인이 된 작가의 일본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사망 원인이 할복이라하여 놀랐던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들은 짧지만 화려하게 피었다 지는 벚꽃이 일본의 엄격한 사무라이 정신과 닮아 있다고 본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자살특공대로 유명한 카미카제 또한 덧없이 지는 벚꽃의 의미를 젊은 군인들의 죽음을 통해 천황을 위해 산화하는 것으로 미화하기도 하였다.그들의 삶과 죽음에 깊숙이 관여되어있었던 벚꽃이 일제강점기를 통해 우리에게는 그저 관앵, 야앵의 벚꽃 놀이 문화가 되었다.삼국시대이래 지리적 위치로 인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청주가 외부에 드러난 부정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현상을 찾아 보려는 것은 추운 겨울에 아직 오지 않은 봄의 기운을 느끼려는것과 같이 성급한 짓이 될는지 모르겠다.호모사피엔스의 육체가 남긴 수만년 발자취는 지하 퇴적층에 켜켜이 묻혀쌓여있다. 그러면 그들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며 남긴 사랑과 미움의 흔적, 의도를 지녔거나 그와 무관하게 저지른 선악의 행동에 대한 결과, 타인에게 끼친 영향력 등은 어디에 남게될까? 하느님이 계신다는 하늘에 남아있을거라고 상상하는 관습적 사고를 포함하여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DNA에 촘촘하게 뭉쳐져 있다고 본다. 불교에서는 카르마(업)라고 한다. 카르마의 인간 육체에 내재적 실현이 동학의 인내천(人乃天)과 같은 숭고한 사상이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저지른 악행은 미래 슬픔과 고통의 결과를 겪어야만 되고, 우리가 베푼 선과 덕행은 오늘 감사해야할 모든 일들에 드러나있다. 어깨 한 곳과 대퇴부 두 곳에 총알이 박혀 월남전에서 귀환한 아버지는 사회적 보상없이 오랜세월 살아왔다. 일제강점기, 6. 25, 월남 참전이라는 불운했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겪은 아버지에게 연민을 가진 내가 어느날 삶이 억울하지 않냐고 토로하였다. “하나도 억울해 할 것 없어. 착하게 살면 돼. 그러면 그게 보상이야”라고 하였다. 아버지에게서 ‘오늘의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하루를 살뿐이다.’를 배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